무려 한달하고도 열흘이 걸렸다.
올해가 가기전에 꼭 완독하리라 다짐했던 약속은 지켰다.
나는 이 소설을 왜 읽으려 했을까.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지금의 우리 시대상황과 맞물려 굉장히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940년대 프랑스의 오랑 시에서 벌어진 일들을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서술한 글이다.
서술자가 마치 그 자신이 아닌듯 하였지만, 리유가 아니고서는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 그가 아니고서는 알수 없었을 사실들로 인해 서술자의 정체가 암시되고, 결국 말미에서 정체가 밝혀진다.
내가 처한 상황과 다른 시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로 인해 몰입도 어려웠다.
쥐가 죽어나가고, 그 뒤에 벌어지는 인간들의 집단 발병.
도시의 봉쇄와 환자 혹은 의심환자들의 격리,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이 과정에서 각각의 위치에 처한 이들의 다른 대응방식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시대와 다른 듯 비슷하다.
해아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의사와 그 주변인들.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진들, 그들도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을것이다.
이 또한 신이 내려주신 일이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감내할 것을 설교하는 종교인.
자신이 저한 현실을 부정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쓰는 남자.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사실이 묻혀지길 바라며 오히려 이 시기가 고맙게 여겨지는 또다른 남자.
"그렇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120p)
눈앞에 보이는 불행,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불행.
보이지 않기때문에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292p)
이 책을 번역한 김화영의 작품해설에는 이 문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리유가, 아니 카뮈 자신이 그의 전 작품을 통해서 던지고 있는 의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더이상 신의 벌이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있다.'
어린아이가 페스트로 인해 고통받다가 숨지는 사건으로 인해 리유는 큰 절망감과 종교와 신에 대한 회의심을 느낀다.
'적어도 그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가 영생의 기쁨을 얻었고, 그로 인해 죽기 직전까지 겪었던 고통에 대해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이란, 꼭 죄지은 자의 것만이 아닌 것임을.
그래서 인간의 삶이 비극인 것임을 처절하게 실감한다.
책을 읽으면서는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아직 독서의 고수가 되려면 멀었다는 기분을 절절하게 느끼며 힘겹게 읽어내려갔다.
소설을 끝내고, 김화영 번역가의 작품해설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언제가 되든 이 소설은 꼭 한번 다시 읽어볼 생각인데,
그때가 되면 이 작품해설을 두번, 세번은 더 읽어보려한다.
알베르 카뮈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면 그의 세계가 더 쉽게 이해가 될수도 있겠다.
다음 카뮈의 작품은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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