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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

더 좋은 곳으로 가자

by 케롤린 2021. 4. 27.

더 좋은 곳으로 가자 ㅡ 정문정 지음, 문학동네

 

올해 3월 발행된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도서관 신착코너에 있던 책을 제목만 보고 덥석 들어 집에 빌려왔다.

 

정문정 작가는 베스트 셀러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으로 유명하다.

제목만으로도 너무 익숙한 그 책을 나는 읽어보지는 않았었다.

 

가볍게 술술 책장이 넘어간다.

그러다 중간중간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멈칫,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 종종 왔다.

 

나와 너무도 닮은 그 상황, 그 순간의 감정.

'아, 나도 그랬었지' 하는 공감의 순간들이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들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가성비만을 기준으로 하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당장 적은 돈이나마 빨리 버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게 된다. 이런 압박감을 느끼며 자란 아이들은 무언가를 원할 때 과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 기준을 두고 보면 김밥은 괜찮지만 마카롱은 사치품이다. 여행이나 유학을 간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현재를 견디는 데 급급하면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개념을 갖기가 어려워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지갑이 가난해지면 높은 확률로 마음도 가난해진다.

 (본문 22쪽)


어렸을때부터 집안 사정에 대해 수없이 들어온, 두 동생을 둔 장녀로서의 나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때 나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엄마가 학원이 필요하냐 물었을 때 '아니, 독서실만 끊어줘'라고 대답한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에서 안도의 표정을 느꼈다. 나는 기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던것 같다. 

엄마의 작은 안심을 위해서 독서실이라도 끊어달라 대답했던 내가 대견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되어서 슬펐던 것 같다. 

 

20대가 되어 국립대에 진학을 하고 좋은 기회에 캐나다 어학연수를 절반의 지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을때 나는 기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기회를 잡은 사실이 기뻤던 반면, 가정형편에 비해 큰 돈이 들어가는 어학연수를 보내지도, 보내지 않을수도 없는 엄마의 마음을 알게되는것이 두려웠다.

대학 졸업 후에는, 우리집에 닥친 또 다른 시련덕에 나는 하려던 취업공부를 접고 그냥 눈앞에 닥친 곳 중에서 골라 직장엘 들어가야 했다.

 

나의 10대와 20대 초반을 내내 지배했던 삶의 모습이 작가가 쓴 몇줄에 모두 들어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역시 있었구나, 위로도 받는 반면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느낄 이런 감정때문에 서글퍼진다.

 

 


 퇴사 준비생이 바쁜 이유는 퇴사 준비를 하면서도 다니는 회사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양심적으로 월급 받는 만큼은 일해야 한다. 향후 이직할 때 평판 조회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고, 게다가 회사에서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보내는데, 이곳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로 받게 되면, 퇴근 후 다른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소진돼버린다. 물론 돈이 많다면 이 모든걸 고려할 필요없이 퇴사부터 하고 천천히 앞날을 모색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건 우리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

 

 핵심은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원으로 살지만 회사 바깥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이다. 회사를 졸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얻어낼까 생각하는 걸 잊지 않는다면, 자아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는 일상에도 자아는 존재하니까.

 (본문 102쪽)


육아휴직을 하고 전업주부로 살면서 나에게 변한 것은 그저 일터의 장소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굉장히 큰 착오였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나의 자존감을 지켜줄 무기가 되어주었다.

6년간의 육아휴직 끝에 결국 사표를 내게 되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경계지었던 나의 일터와 집이 무너짐을 느끼며 약간의 상실감에 괴로웠다.

 

나는 언젠가는 전업주부라는 직함에 꼭 사표를 던지리라 마음먹던 터였다.

둘째아이가 열 살이 되는 해는 내 나이 마흔을 넘기게 되는 때이니 꼭 그전엔 어떻게든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020년 초까지만해도 나의 커다랗고 원대한 계획에 큰 차질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왠걸, 하필 첫째아이가 초등1학년이 되던해부터 모든 일상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바람에 나의 계획과 일상은 물론 나의 야심차던 마음까지도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말았다.

 

위의 구절을 읽으며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단어들에 나의 상황을 대입해가며 말을 이어간다.

'내가 바쁜 이유는 나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준비하면서도 지금 나의 본업인 전업주부로서의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양심적으로 엄마라면 최소한의 집안일과 아이돌보는 일들은 해야한다. .......

전업주부의 자리를 졸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걸 잊지 않는다면, 자아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개의 자아를 잘 운용할 수 있으면, 한 가지 자아를 접어야 하는 순간에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본문 114쪽)


그렇다. 나는 엄마로서의 자아 말고 다른 자아를 더욱 많이 가지고 싶어 발버둥 치던 거였다.

그것때문에 너무 힘들게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어서 엄마로서도 충분치 못하고 다른 자아도 만들지 못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이었는데 사실 나는 잘 해나가고 있던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그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 지나치게 여러개의 자아를 한꺼번에 가지려고 하지 않기.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므로 엄마로서의 자아의 비중을 조금 더 염두에 두기.

 

 

위로가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므로.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엄마로서의 나를 조금 내려놓아도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쳐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몸은 편해졌지만 정신적으로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쏟아야하고 고민하는 시간도 배로 길어졌다.

내안에서 스스로 새어나오는 위로든 타인이 건네주는 위로든 내 머릿속에 구획을 딱 나누어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소소한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 옆에서 진득하니 나의 상담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심결에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것이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은 기분.

 

나만 이런것이 아니었구나,로 시작하는 공감에서 비롯된 마음 열림 상태가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어서 작가가 하는 말이 쏙쏙 마음에 와 박힌다.

자존감 충전도 어느정도 되었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지금 굳이 급할 필요도 없겠다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능력에 요령을 더하면 멋지게 갈 수 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능력도 하나하나 쌓아가고 요령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인생의 경험치를 올려가자.

그래, 우리 다 같이 더 좋은 곳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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