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간을 새롭게

책 한권에 관한 짧지만 오래된 기억

by 케롤린 2021. 3. 11.

유년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는것이 없다. 

아주 단편적인것 몇가지만이 강렬하게 남아있을 뿐.

 

초등학교2학년, 내 기억속의 할아버지 담임 선생님(실은 할아버지가 아니셨겠지만)은

아이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받아쓰기가 틀리면

본인이 직접 만드신 납작한 회초리로 발바닥을 때리셨다.
발바닥 자극이 건강에 좋다며, 겁에 질린 아이들 얼굴이 귀엽다는듯 웃으시며 가볍게 찰싹찰싹.

그리고 기억나는 또다른 한 장면,

칠판에 커다랗게 써주셨던 한 외국 작가의 이름. 

'피에르 쌍소'.

 

아마 그 당시에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작가이었던가,

무슨 말씀을 하시며 그 이름을 써주셨던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학교에 입학한 첫 해, 교내서점 구석진 곳 어느 책장에서 눈에 띄던 이름 '피에르 쌍소'.

9살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작가의 책을 샀더랬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2라니. 1권도 없는데 2권을 사다니.

지금의 나를 생각해보면 절대 그랬을리 없었을텐데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책을 샀던것 같다.

그래서 다 읽어보았느냐고?

아니다. 읽은 부분은 4분의 1정도?

심지어 밑줄그은 부분을 지금 보니 웃음이 난다. 

내가 저런 문장에 밑줄을 쳤었구나.

 

 

 

 

그리고 지난 2019년, 동네엄마들과 잠깐 들른 잠실의 중고서점에서

신기하게도 발견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

 

 

 

아무생각없이 둘러보던 중고책들 중에서 어떻게 이 책이 내눈에 딱 띄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내가 좋아하던 작가도, 책도 아니었는데 무언가 보물을 찾은 느낌.

이 책을 발견했을때의 그 설레임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절판된 책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선생님은 9살의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이 작가를 소개시켜주셨는지 의아한 일이다.

진심으로 본인의 작가취향을 제자들과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으셨던건지,

그저 자신의 독백을 제자들을 청중삼아 내뱉으실만큼 외로우셨던건지

어느쪽이든 나를 비롯한 그 반 아이들은 선생님께 어떤 공감도 위로도 해드릴 수 없었음이

짠한 마음으로 남겨져있다.

 

지금은 어느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시는지도 잘 모르는 선생님께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싶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작가의 이름 하나가 

몇 안되는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에 남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특별함으로 이어져가고있다고.

이제는 이 책을 읽고 선생님과 토론할 수 있는 나이도 되었는데 그러지 못함이 아쉽다고.

6학년, 13살의 어느날 교무실에 잠깐 들른 나에게

겨울철 석유난로위에 구운 찰떡을 굳이 싫다는데도 손에 쥐어주셨던 기억이 사실은 너무 따뜻했다고.

(그렇지만 그 당시 열세살 어린이의 입맛에 너무 맞지 않아 선생님 몰래 떡은 화단 흙속에 묻어버린 비밀이 있다고.)

 

살아가며 채워지는 수많은 기억들중에

책에 얽힌 이런 추억하나가 가슴속에 남아있다는게 참 감사한 일이다.

선생님은 그 사소하고도 작은 행동들이 초등학생 꼬마에게 그리고 그 꼬마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셨을것이다.

나도, 의도하든 의도치않든 사소하고도 따뜻한 추억을 누군가에게 종종 만들어줄수 있는 삶을 살면 좋겠다 생각한다.

 

 

이제는 이 책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천천히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책장속에 꽂아만두고 외면했었는데

긴 시간 방치되었던 저 글자들을 하나하나 새겨보아야겠다.

 

'순간을 새롭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홉살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2) 2021.03.15
오늘도 뉴스를 보며 토론을  (0) 2021.03.12
쉬고싶을 땐 손뜨개를  (2) 2021.03.10
열심히 읽겠다는 다짐의 글  (2) 2021.03.09
매일 경제신문 읽기  (0) 2021.02.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