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문구류를 꽤나 좋아한다.
연필, 펜, 볼펜, 지우개 등등 맘에 드는것을 발견하면 약간의 사재기를 일삼던 병(?)이 있었다.
결혼 후에 남편보기 부끄러워 많이 자제한다고는 했는데, 아직도 내 화장대 깊숙한 곳과 가방 곳곳에는 모아둔 문구류들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딸이 나의 성향을 약간은 닮았는지, 아니면 또래 여자친구들과의 문화가 시작되어 그런것인지 예쁜 문구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쇼핑몰에가도 문구코너가 있으면 꼭 한참을 서서 아이쇼핑을 즐긴다. 나처럼.


어느 초등학생 여자 아이의 필통에 모여사는 연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
학교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쓸 얘기도 없는 일기는 매일 써야하고,
주인의 글씨는 삐뚤빼둘..... 그래서 연필들도 힘들단다!


이미 뒷 표지에서 필통속의 연필들의 상황을 어느정도 짐작했던 바이다.
첫 페이지부터 이들의 고충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주인공 담이가 학교에 마구 뛰어가는 바람에 필통속의 연필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밤이되어 할 일들을 마치고 고요해지면 필통 속 연필들은 대화를 한다. 하루동안 서로 필통 밖에서 겪은 일들을 나눈다.
대체로 좋은 내용은 없다. 담이의 손 혹은 담이 친구의 손으로 이어지고 매번 비슷한 내용들을 쓰고 돌아온다.
실제로 연필들이 수다쟁이였다면 정말 저런 대화를 했을것 같다.
똑같은 내용의 일기를 쓰는것도 지겨울테고 게다가 주인이 연필 꽁지를 잘근잘근 깨물땐 얼마나 불쾌할까!

그러던 어느날 연필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의 낯선 변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담이가 친구에게 사이좋게 지내자는 편지를 썼단다.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몇번이나 연습을 하면서.
무지개 연필이 그 편지를 쓰고 왔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주인 담이의 마음이 덩달아 느껴지면서 너무 설렜단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담이의 연필들이 바빠졌었구나. 담이도 예쁘게 글씨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연필들을 깨닫게 된다.
그 뒤로도 연필들은 담이의 학교생활과 더불어 사소한 변화들을 겪게된다.
주인 담이에게 늘 불만이 많았던 필통 속 친구들은 담이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연필을 즐겨 쓰던 어느 날, 제가 처음 쥐었던 연필은 어떤 연필이었고 처음으로 쓴 글자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어요. 그 연필도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쓰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해졌거요. 그러자 신나는 일을 일기에 적을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 지우고 다시 쓸 때, 매끈하게 깎일 때의 연필들은 어떤 마음일지 마구 궁금해졌어요. 그렇게 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길상효
나도 하나 둘 연필과 펜들을 모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쓸때의 느낌과 감촉이 어떻게 다른지 조금씩 아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작가처럼 저런 궁금증을 가져본적은 없다. 그것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의 차이일까.
담이의 필통 속 친구들은 담이를 이해하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내 필통 속 물건들은 어떠할까. 어떠했을까.
여기저기 가방과 서랍에 비닐도 뜯기지 않은채로 쌓여있는 저 수많은 문구류들이 몇 년 동안 쓰임을 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나도 변명거리는 있다.
공부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많아서 잔뜩 사다 준비해놓긴 했었는데 막상 엄마로서의 삶을 살다보니 생각만큼 쓸 시간이 없었다고. 게다가 지금은 연필로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글을 쓰게 되어버렸다고.
이렇게 내 스스로에게도 변명을 해 보지만, 나는 아직 자신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왜 매번 이렇지?'
밤 늦은 시간, 혹은 이른 밤에 깜빡 잠들고나서 이른 새벽시간에 어설프게 깬 시간이 되면 늘 이런 후회를 한다.
오늘 하루도 펜을 잡은 시간이 극도로 부족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
담이의 필통 속 연필들은 행복해졌는데
나와 내 필통 속 펜들은 아직 그렇질 못했구나.
뭐 어쩔수 없지.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꺼내줄 수 밖에.
연필의 나무 냄새, 사각거리는 느낌.
볼펜의 부드럽게 써지는 느낌과 펜의 묵직한 느낌. 만년필의 귀중한 느낌.
맞다. 나도 이런것들을 좋아했었는데 한동안 또 잊고 살았음이 떠오른다.
오늘은 무얼 써볼까, 내일은 어떤 연필을 어떤 펜을 쓸까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행복은 커다란 한방이 아니라
사소한 행복의 빈도가 중요하다던가.
나도 다시 소소한 행복을 누릴 시간임을,
[깊은 밤 필통 안에서]가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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