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나절, H에게서 톡이 왔다.
첫째아이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쟤는 왜 공부를 할 의지도 없고 욕심도 없는거냐고. 틀린게 있어서 지적 받았으면 놀지만 말고 좀 해야하는거 아니냐고.
아니, 9살짜리가 어찌 스스로 공부에 욕심을 내겠어. 그렇게 스스로 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어.
너는 그 나이에 혼자 공부 하고 싶었었냐?
예쁜말도 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아들래미를 왜 그렇게 못마땅해 하는거야. 애 좀 그만 잡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작년, H의 남편이 우울증 진단을 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나는 그녀의 태도를 어느 정도는 고쳐주어야 남편이 좀 괜찮아질거라고 직언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채,
한참 지난 뒤에야 술자리에서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려했더랬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 그래서 네가, 네 가족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ㅡ 로 시작하는...
H도 불안과 강박으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아는터라,
나는 그녀에게 감히 상처 될까봐 이번에도 직언을 하지 못했다.
우리 애도 그래, 진짜 나도 속 터지지.
화내는 것 조차도 지겨워져서 그것때문에 또 화가나고 무한 반복이다 진짜.
근데 어쩌겠어. 아직 어린걸....
아들이 어제 얼마나 나한테 말을 예쁘게 했었는데, 일부러 만나면 얘기해주려고 했었어.
그런 착한 아들래미인데 너무 미워하지 마..
비슷한 감정을 겪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그녀의 말에 공감해주고, 이래서 엄마노릇이 힘들다 같이 푸념한다.
실제로 H의 9살 아들은 착하고 순수하고 어떨땐 어른스러운듯 너무 예의바르게 말도 예쁘게 한다.
동생이 울면 오빠노릇 톡톡히 하면서 잘 달래주고 놀이터에서는 우리 아들 그네도 선뜻 밀어주는 착한 동네 형아다.
엄마의 눈에는 왜 그런 장점들이 떠오르지 않는건지,
H에게 아들의 그런 장점들을 더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너무 억지스러운것 같아 말해주질 못했다.
진심인지, 인사치레인건지
H는 그 몇분의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고 고맙다고 한다.
그럼 다행이지만 H야,
사실 나도 이게 뭔 오지랖인지 모르겠다.
나도 내 딸 내 아들의 장점이 뭔지 매일 깜빡하는데, 그래서 단점이 눈에 띄면 그걸 또 꼬투리 잡아서 기어코 잔소리를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사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이라든가, 부진한 학습이라든가 그런게 지적받으면
아이들의 부족함 그 자체보다는
내가 엄마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지적받는 것 같아서,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더 화가나는 것도 있더라고.
어쨌든 오늘 네가 잠못이루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작년엔 답답한 일 있으면 코 옆 호프집에 모여서 치맥먹으며 수다떨면서 풀고 그랬었는데
올해는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네.
오늘밤은 나도 우리 아이들의 장점을 좀 생각하면서 자야겠다.
아이들은 그냥 지금 이대로 잘 커나가고, 잘 해나가고 있는건데
괜한 나의 부족함때문에 아이들을 다그치고 혼낸적은 없는지, 매일매일 자꾸 돌아봐야겠다.
오늘 저녁, 두 녀석이 꽁냥꽁냥 한데 뒹굴면서 깔깔거리던 그 웃음을 잃고싶지 않다.
매일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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